타버린 성냥개비의 몸은 휜다. 검게 타들어간 나무가 만들어내는 이렇듯 유기적인 곡선은 때로 무용수를 연상시킨다. 하나의 화폭 안에 수도 없이 들어찬 성냥개비들은 발레 군무 또는 합창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조돈영은 드물게 보는 우아함으로 모델들의 무대를 연출한다.
타버린 성냥개비의 몸은 색채로 뒤덮이기도 한다. 검게 타버린 머리와 하얗게 남아있는 몸이 이루는 대조에서는 흡사 수도승 같은 경건함, 목청을 가다듬는 수수한 흰 두루마기 차림의 판소리 소리꾼의 자태도 느껴진다. 조돈영의 화폭 위로 수도사들,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의 행렬이 펼쳐진다.
조돈영의 작업실에는 점묘화법으로 그린 강렬한 색채의 풍경화, 성냥개비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도 가끔, 아주 간혹 눈에 띈다.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하지만 어느 틈엔가 자그마한 나무막대들이 다시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 몇몇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조돈영이라는 이름보다 성냥개비 거장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그는 자신이 선택한 모델을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에 세웠다. 아직 불붙지 않은 상태, 불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상태 또는 이미 다 타버린 상태 등, 성냥개비는 화면 속에서 정연한 대열을 이루거나 제멋대로 뒤섞여 장난을 치는 모습, 그리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시정 넘치는 빗줄기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동그란 머리에 가느다란 동통을 지닌 성냥개비의 자태는 때로 아주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거꾸로 세워놓은 물방울 같은 이 형태는 비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조돈영이 상상해낸 각각의 변주는,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매우 시적인 하늘의 공간으로 그를 이끈다.
“난 달을 좋아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는 곧 새로운 작품 구상에 들어간다. 그물을 드리우는 어부처럼.
붓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붓의 움직임은, 석도가 말했듯이, 혼돈 속에 빛이 제 자리를 잡고 뿜어 올라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순간이 되면 붓과 먹, 그림,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만, 나는 스스로 존재하며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은 내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먹은 그 자체로 표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붓은 내가 선을 긋는 수단이지, 붓이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산고를 통해 창작품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지 창작품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인 하나로부터 무수히 많은 것이 갈라져 나온다. 무수히 많은 것으로부터 전체인 하나가 생겨난다. 전체인 하나의 변신은 음과 양을 낳는다.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잠재태는 완성된다.
프랑수아즈 모냉 미술사가, 미술잡지 “아르탕시옹”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