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작품 앞에서 – 얼마 전에 – 나는 ARMAN의 ‘적취(積聚)’와 엄청난 성냥갑을 단숨에 불태우는 조각가 CÉSAR의 체험을 언뜻 생각했다. 내가 비교의 조건반사에 지나치게 따랐던 것일까…..
그러나, 1939년생인 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세밀히 관찰하면서, 간결하고 조금은 냉소적인 그의 성냥개비들은 군중들이요, 인간 집단이며, 무리·혼잡·집단 이주 및 순례자들의 상징인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의 덧없고 연약함과 소박한 위대성, 그 외에도 한국 국민의 집단무의식 심리와 전통적인 교육에서 오는 또 다른 것들을 작가는 꾸밈없이 나타내주고 있다.
이 성냥개비들은 우리 자신의 반영, 행복의 순간들, 혹은 헛되이 보내버린 세월들, 치솟아 불타버린 존재 또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나날의 작은 불티들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요약해준다.
평온과 번민을 동시에 전해주는 그의 작품은 무게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엄격하고도 농도 짙은 작품을 통해 이 작가의 유망한 장래가 기대됨을 나는 믿는다.”
로제부이요
“Some time ago when seeing the first DONYOUNG CHO painting, I thought of Arman’s “accumulation”, or of sculptor Cesar’s experiments embracing a whole big box of matches in one stroke. Too strong really was my obedience to use the everlasting reflex to compare artists.
Quickly I had to draw back when penetrating the symbol world of this Korean artist born in 1939. A simple hint, somewhat ironical, and I understood that these matches stand for crowds, accumulation of humans, regiments, mass movements, exodus or pilgrimages. Without pointing out as a moralist, DONYOUNG CHO shows us the fragility of life, its greatness in simplicity and many other notions deeply seated in the common unconscious knowledge of the Korean people, as well as in their traditional education.
Mirror-images of ourselves, of instants of happiness or spoiled years, these matches illustrate and resume human existence: eruption of brasiers or daily small flames in continued succession.
Better don’t misunderstand. The paintings of DONYOUNG CHO carry a profound message. They lead you to serenity just as much as to anxious meditation.
I believe in this austere and dense work, in a splendid career of the author of these paintings.
Roger Bouillot (art critic) November 7th, 1982
조돈영씨는 최근 4, 5년째 하나의 테마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다 버린 성냥개비다. 그는 이 타다버린 성냥개비를 화면 가득히 군집시키기도 하고 단순히 몇 개로서 확대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들은 마치 집체훈련을 받고 있는 병대와 같이 정연하게 줄을 서기도 하고 학교를 끝내고 교문을 박차고 나오는 아이들과 같이 흩어지기도 한다. 그 표정들은 한결같지 않고 천태만상이다.
그의 데뷔시기의 작품은 표현적인 추상의 경향을 띠었고, 이후 얼마 동안은 표현적인 요소가 강한 자연적 소재의 작품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밟은 것처럼 오랜 기간의 모색과 변신의 와중을 지나온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연작 역시 이왕의 모색과 변신의 맥락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보면, 여기에서도 미묘하나마 풍부한 변모의 논리를 숨기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의 성냥개비를 모티브로 한 작품의 과정만 살펴보아도 그동안 어떤 변모가 지속되어 있는가를 읽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비교적 초기에 해당되는 것에는 엄격한 구성 의지에 따른 화면 질서가 언제나 강조되었다면, 근작에선 모티브인 성냥개비란 단위들이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고 약동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초기의 것에는 모티브의 선택이란 관념이 밖으로 강하게 나오는 반면, 최근에는 성냥개비 하나하나에 존재론적 의미를 가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성냥개비란 불을 일으키는 어느 한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불을 일으키고 난 후는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게 된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성냥개비는 불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그 생명이 확인되는 것이고, 또 확인되자마자 생명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극적인 생인가.
우리 인간들에게 참으로 긴요한 것이면서도 언제나 일상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이 존재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그의 모티브 선택의 동기가 되는 것이지만, 사실 화면에 재현된 이 많은 성냥개비들은 결코 일상의 그것이 아닌 작가의 또 하나의 오브제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다버린 성냥개비는 이미 생명이 끝난 유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그는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 그것들은 다시 서로 짝짓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서로 손을 당기기도 한다. 서로 소근소근 말하기도 하고 합창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무어라고 크게 절규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다시 왕성한 생명력으로 재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쓸모없이 버려진 타버린 성냥개비가 아니다.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한, 또 다른 오브제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성냥개비란 모티브를 빌린 또 다른 신체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때때로 그의 작품을 포스터 리얼리즘(후기사실주의)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나친 시각적 현상만을 내세우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의 화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은밀한 생명과 그것이 벌이는 현상을 감안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영역에 부단한 연결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바로 이점은 그의 작품이 앞으로 풍부한 변화의 내용으로 발전될 소지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