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생명체 채빛의 타다버린 성냥개비들
“또하나의 생명체·채빛의 타다버린 성냥개비들
정착한 지 이미 8년째가 된다. 파리에 정착하면서 그는 한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타다버린 성냥개비란 독특한 모티브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벌써 그 특유의 상징기호인 타다버린 성냥개비는 파리의 유수한 살롱들에 자주 등장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것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조국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못한 편이다.
비교적 국내전을 아껴온 그의 과묵성에도 요인이 있을 것이다. 소재의 특유성에도 일단의 요인을 부여해볼 수 있으리라. 지나치게 유별나다기보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소재라는 점에 더욱 커다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사실 성냥개비란 가장 값싼 물질에 속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물이란 데서 그것은 우리의 시각을,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하물며 불을 붙이고 난 후의 타버린 성냥개비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버려져야 하는 하찮은 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그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회화적 소재로서 생각할 수 없었던 이 타버린 성냥개비가 그의 화면의 중심적 모티브로 등장하면서, 타다버린 성냥개비는 버려진 재가 아니라 화면이란 현실에서 새로운 생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기한 소재의 발굴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의 재생이요 부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재생과 부활은 단순한 성냥개비의 그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으로서의 다시 태어남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성냥개비들은 우리들의 일상 속의 성냥개비란 개체의 반영도 그것의 현상적 묘사도 아니다. 그것은 이제 성냥개비가 아닌 그 어떤 것이다. 그의 화면에서 비로소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또 하나의 실존이다. 일상적 성냥개비의 물질적 문맥에서 벗어난 세계의 또 다른 존재물이다.
이상하게도 이 새로운 존재물로서의 성냥개비는 타버린 성냥개비가 환기하는 그런 연민이나 비극적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들 성냥개비들은 다양한 표정들을 지니고 있고 그 표정들은 긍정적이요 낙천적인 것으로 비친다. 마치 재잘거리며 몰려다니는 참새 떼나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쳐가는 물고기 떼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몰려다니는 생명의 리듬이 여울짓는다.
몇 해 전에 가졌던 국내전에서의 작품보다 근작에서 더욱 그러한 생명의 리듬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 또한 한편 근작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단순한 성냥개비만이 아니라 성냥개비와 바탕으로서의 화면과의 관계가 긴밀한 구성의 밀도 속에서 추구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계획되고 짜여진 공간의 설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공간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생명체가 뛰노는 장소로서, 생명체가 살아 호흡하는 현실의 장으로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